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르빈 롬멜 (문단 편집) ===== 헌신하는 군 지휘관 ===== 프랑스 점령 후,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려 계획하게 되었으나 이때 동맹국인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의 진격속도를 보고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진채 일을 벌렸다가 그리스에서도 털리고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에게 대패, 이탈리아가 유일하게 소지한 식민지인 리비아를 되려 먹힐지경에 처하자 무솔리니까지 나서서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문제는 이 시기에는 소련 침공 작전 준비가 대부분 진행된 상태라, 빼낼 수 있는 병력이 얼마 없었다. 그런 이유로 독일군은 [[독일 아프리카 군단|소수의 기계화 부대]]와 '''유능한 장군 한 명'''을 보내는 것으로 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이탈리아가 축출당하는 것만 막는 선에서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그때 도착한 것이 바로 사막의 여우라 불리는 '''롬멜'''이었다. 롬멜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정찰기를 타고 영국군 지역 상공을 정찰했다. 당시 영국군의 상태는 이탈리아군을 추격하는 데만 집중되어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거기에 당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은 이탈리아군을 몰아붙이는 와중에 그리스에 독일군이 침공하면서 그리스 방위라는 정치적 이유로 2개 사단이 차출당해 실제 전력 자체도 약화되어 있었다.[* 영국군 사령관 웨이벌은 병력 차출에 대해 군사적으로 어리석은 행위라고 반대했지만 처칠 수상은 그리스를 지키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강행했다.] 영국군의 상황이 어수선하다는 점을 파악한 롬멜은 아직 수송선에서 병력이 제대로 하차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반격을 개시한다. 반격할 병력이 없다는 말에 롬멜은 트럭과 경차량에 나무판자를 덧대어 전차 모양이 나게 만들라고 지시하고 이들을 끌고가 기만작전을 펼치는 과감함을 발휘했는데, 놀랍게도 이 작전이 대성과를 거뒀다! 이미 주력 지상 병력을 처칠의 명령에 따라 억지로 [[그리스]]에 파견했다가 상당수 잃어버려 약체화된 영국 육군은 지휘관 교체로 방어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블러핑한 독일 육군의 공격에 간단히 격파당했고 무엇보다 영국군 상황 자체가 보수적이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사실상 아프리카의 전쟁은 롬멜 대 영국군의 전쟁이 되어 영국군으로부터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며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 이 무렵 그를 주제로 삼은 [[군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곡명은 [[우리의 롬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194e5b0e282e83438b58af8d7472f2c.jpg|width=100%]]}}} || || {{{#000 Sd.Kfz. 250/3 그라이프 호에서 통조림으로 끼니를 때우는 롬멜 장군}}} || 영국군에게 롬멜은 정말로 무섭고 미운 적이지만, 동시에 군인으로서 존경할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처칠조차도 때때로 롬멜을 언급하며 '까마귀 무리 속 단 한 명의 진짜 군인'이라는 식으로 묘사했다. 대치 중이던 영국군 야전병원에 식수가 떨어졌다는 소문이 들리자 장갑차에 백기를 달고 식수를 전달하기도 했고, 언제나 최전선에서 부하 장병들과 함께 했기에 식사조차도 장갑차를 타고 달리는 중에 장병들과 함께 [[통조림]]같은 [[전투식량]]으로 때우기가 십상이었다.[* 원래 유럽에서는 [[독일 국방군|독일군]]의 주식이 [[빵]]과 [[감자]], 그리고 [[소시지]] 등의 조금의 고기였다. 그러나 사막에서는 이런 식품들은 변질이 쉬웠기에 딱딱한 [[비스킷]]과 [[콩]]과 [[정어리]] 및 이탈리아제 [[콘비프|쇠고기 통조림]]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나마 고기인 통조림은 힘줄이 대부분을 차지한 저급 통조림이었다. 특히 비타민이 너무나도 부족하여 민가에서 귀한 [[과일]]을 교환해서 얻어오거나 대부분 연합군 보급품을 노획하여 보충하였다고 하였다. 한스 폰 루크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의 남방 작전으로 말라리아 약 부족에 시달리던 영국군과 교환하기도 했다고.] 이탈리아 육군 장교들이 사막에서도 하얀 식탁보를 깐 테이블 위에 포도주, 밥, 반찬을 차려놓고 먹던 것과 비교하면 천지차이의 마음가짐, 즉 헌신하는 군 지휘관과 병사들의 처지와 동떨어진 군 지휘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을 해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청년때부터 군 생활을 해온 직업군인들인 장군들은 청년들인 병사들보다 20~30살은 더 늙었으니 똑같은 야전 식사는 부담이 된다.] 그렇게 일선 장병들과 함께하다가 잠깐 안 보인다 싶으면 어느새 정찰기를 타고 적군 진지 위로 날아가는가 하면, 아군 진지 위로도 비행하며 이상이 없나 확인했다. 롬멜은 일선 병사와 부사관, 초급장교들에게 친절히 대하며 그들의 의견과 고충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작전에 반영했으나, 지휘관들에겐 악몽 그 자체였다. 심지어 어느 육군 장교는 잠시 진격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자신의 머리 위로 날아간 정찰기에서 롬멜이 '''"지금 당장 진격하지 않으면 내가 내려가서 부대를 지휘할 테다"'''라고 적은 쪽지를 떨어뜨린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적의 저항이 너무 거세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보고를 받자 '자네를 포함해 병력 절반이 희생당해도 그건 예정된 희생일 뿐이야!'라며 공격을 계속하게 독촉하기도 했다. 얼마나 지휘관들을 거칠게 채찍질했던지, 롬멜과 동갑내기인 휘하 사단장 육군 소장 하인리히 폰 프리트비츠는 그의 독촉을 받고 황급하게 전투에 나섰다가 초장에 전사하고 말았다.[* 롬멜이 그에게 가까이 있는 적은 사실상 피자배달부 같은 애들이니 철수한 거나 다름없다고 하자, 롬멜을 너무 믿은 나머지 부대도 아닌 차 한대로 달려간 것이다. 그것을 본 아군이 말리려 했지만 그냥 돌진했고 이윽고 적진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렸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3.bp.blogspot.com/Rommel%27s_Staff_Car_(8).jpg|width=100%]]}}}|| || {{{#000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탑승한 호르히 901/40 차량}}} || 심지어 그 자신은 너무 빨리 진격한 나머지 퇴각하는 영국 육군의 후위에 끼어버리는 경우마저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영국 육군들 중 그 누구도 옆에 있는 차량이 롬멜의 것이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반응하지 않았고, 결국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야음과 함께 롬멜이 사용한 지휘차량 [[AEC 지휘장갑차|'마무트'가 노획한 영국제 장갑차]]였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사실 프랑스에서도 그는 이런 일을 겪었는데, 전차 2대를 대동하고 단독으로 전선 시찰을 나갔다가 숨어있던 영국 육군 전차 부대의 기습을 받고서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서 2시간 동안 숨어있었다가 구조된 일화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영국 육군은 독일 육군이 근처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이어 벌어진 [[아라스 전차전]]에서 첫 패배를 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그를 괴롭힌 것은 적군보다는 오히려 보급품의 부족과 무능력한 이탈리아 육군이었다. 이탈리아 육군은 병력은 많아도 전의와 능력이 중구난방이어서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탈리아군은 앞서 멋도 모르고 이집트를 쳤다가 영국군에게 영혼 끝까지 털린 상태였고 지중해 재해권은 영국 해군이 꽉잡고 있었다. 하지만 용맹한 자들도 있어서 아리에테 사단과 리토리오 사단을 포함한 이탈리아 육군 제20군단은 예외였다. 이들은 열심히 싸워서 몇몇 독일군 부대보다 훌륭한 전과를 내었고, 덕분에 롬멜은 이들을 매우 아꼈다. 물론 그런 20군단도 '''영국군 포화를 맞자마자 도망가버렸다'''면서 롬멜이 불평할 때가 간혹 있었다. 여기에 중요한 진격을 할 때마다 연료와 탄약이 크게 모자랐다. 당시 독일 육군 3개 사단에 대해 이탈리아 육군은 6~7개 사단으로, 이들의 총 보급 소요는 독일 육군과 비슷하거나 더 많았다. 그런데 정작 이탈리아 육군의 보급품 운반용 차량은 독일 육군의 절반도 되지 않고, 그나마 성능도 나빠 고장률이 매우 높았다. 더구나 독일군조차도 차량은 실제 소요의 절반을 조금 넘는 정도밖에 갖고 있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니 진격을 하면 할수록 보급은 점점 어려워졌고, 결국 후퇴의 원인이 됐다. 이런 상황 때문에 롬멜은 언제나 보급에 불만을 제기했으며, 국방군 총사령부는 그런 롬멜의 불평을 받아들여 대소련전으로 병력과 물자가 소모되어가는 마당에도 [[독일 아프리카 군단|아프리카 군단]]에 의외로 많은 양의 보급품을 보내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지중해를 장악한 영국의 해/공군의 공격으로 많은 물자가 수장된 데다가 하역된 물자의 보급을 담당한 이탈리아 육군의 비효율, 그리고 사실상 해안가에 놓인 비포장인 단일 도로망에 의존하는 취약한 보급로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양의 물자는 절대 제시간에 충분한 물량이 도착할 수 없었다. 결국엔 롬멜도 거칠고 긴장된 생활의 연속으로 인해 병을 얻어 본토로 떠나게 된다. 롬멜은 본디 규칙적인 군 생활에다 산악등반과 승마 등 운동으로 단련된 강인한 체력을 지녔으나, 북아프리카 사막의 혹독한 환경은 그런 그에게도 너무 힘들고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그가 아프리카를 떠난 사이 [[엘 알라메인 전투|엘 알라메인]]에서 [[영국]]의 대반격이 시작되고, 급하게 돌아왔던 롬멜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히틀러의 명령마저 무시해버리면서 병력을 최대한 온존하며 퇴각하기 시작한다. 이후 [[횃불 작전|영미 연합군의 모로코 상륙]]으로 튀니지에 갇혀버렸고, 총통을 직접 만나 병력 증파를 요청하러 독일로 갔지만, 히틀러의 요구로 그는 요양을 위해 남게 되고 아프리카 방면군 사령관은 [[한스 위르겐 폰 아르님]] 육군 상급대장으로 교체된다. 이는 이미 대세가 결정되었으며, 여기서 롬멜이 포로라도 되면 심각한 위신 손상이 올 것을 우려한 조치로, 실제로 아르님 장군은 분전을 펼쳤으나 결국 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항복한다. 항복 전 아르님은 롬멜이 자신에게 인계하고 간 마무트 장갑차를 직접 소각하며 오열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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